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(문단 편집) == 건물의 특징 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systemclub.co.kr/iBwkywiPsFsKgHBo19eg9wOu9UFEpj.jpg|width=100%]]}}}|| ||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 일대를 재현한 축소 모형 || 이 건물의 근본적인 문제는 '''[[조선]]의 [[정궁]]인 [[경복궁]]의 [[반달리즘|앞부분을 밀어버리고 지은 건물]]'''이라는 데에 있다. [[경복궁 흥례문|흥례문]], [[경복궁 영제교|영제교]], [[경복궁 유화문|유화문]]과 주변 [[행각]]을 모두 철거해버린 자리에 지었다. 정문인 [[경복궁 광화문|광화문]]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철거될 처지였으나, [[아 이건 좀|반대 여론]]에 부딪혀 [[건춘문]] 북측으로 옮겨 지어져 다행히 살아남았다.[* 광화문 철거는 당시 조선 사람들은 물론이고,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학자를 비롯한 일부 일본인들까지 반대한 사안이었다. 다만 그 덕에 겨우내 살아남은 이 원래 광화문은 [[6.25 전쟁]] 당시 폭격으로 인해 불타 소실되었다.] 이 때문에 궁궐의 중심인 [[경복궁 근정전|근정전]] 일원의 정문인 [[경복궁 근정문|근정문]] 코앞까지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서[* 위 모형 사진에서 총독부 뒷편의 작은 기와문이 바로 [[경복궁 근정문|근정문]]이다.] 뒷부분을 가로막는 형태가 되어버렸고, 경복궁 뒷편 [[북악산]]과의 미적 조화도 깨져 답답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되었다.[* 한국 말고도 식민지 였던 나라들 역시 총독부가 있다. 다른 나라들도 지금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. 경북궁 앞이 아닌 다른 곳에 지었다면 헐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. ] 그 외로는, 조선에서 세 번째로 [[엘리베이터]]를 설치한 건물이기도 하다. 건축에는 당시엔 최신 문물이었던 [[철근 콘크리트]]를 사용했다. 그 철근은 일본 [[코쿠라시|코쿠라]](구 [[야하타히가시구|야하타시]][* 일본 두 번째 제철소인 야하타 제철소가 있다. 현재도 [[스미토모그룹]] 산하의 신일본 제철에서 관리 중.]) 및 오사카에서 구해왔다. 외벽 표면은 [[창신동]] 채석장에서 캔 화강암을 썼고, [[대리석]]은 황해도 금천, 평양, 원산에서, 모래 및 자갈은 [[한강]]에서 각각 구해오고 시멘트는 오노다시멘트[* 1998년 닛폰시멘트와 통합해 다이헤이요시멘트가 되었다.] 제품을 썼으며, 장식철물, 문철물, 가구, 공예품 등은 [[미국]]과 [[유럽]]에서 수입해 왔다. 당시 기준으로서는 매우 호화로운 건물이었다. 외적으로는 서구 [[바로크]] 양식 건물에 잘 쓰이는 [[구리]] 돔 지붕이 인상적이었다. 돔 지붕의 외장재로 외국산 구리 동판 2만 4800근(1만 4880 kg)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. 건설 직후에는 붉은 구릿빛이었지만, 시간이 지나 녹슬어 그럴싸한 청동색 지붕이 되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조선총독부 청사 건물형.png|width=100%]]}}}|| || 조선총독부를 위에서 바라본 모습 ||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물형은 위 사진과 같이 날일(日)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. 여기엔 [[일본]]이 조선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[[서울]]에 박아 넣은 '日本' 글자의 '日'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있었다. 실제로 건물을 위에서 보면 '日'자 모양으로 생겼다. 당시 일본인들도 이 떡밥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제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의사당, 조선총독부, 대만총독부가 모두 '日'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. 그러나 이는 낭설로, 조선총독부 청사를 일부러 [[경복궁]] 자리에 두어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고 조선 왕조를 욕보이기는 했지만 [[풍수지리]]적 이유가 반영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일제는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. 건축물들을 위에서 보면 중간에 빈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다. [[독일 국회의사당]]이나 [[웨스트민스터 궁전]]을 포함해서 이외 많은 건물에서 마치 건물이 벽과 같이 주위를 두르고 있는 형태가 나타난다. 그러니까 날일자 모양이 그리 특이한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. 다만 저 설계 자체는 독일 국회의사당이나 웨스트민스터가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공공건축물 설계를 도입한 것이다. 대표적인 것이 [[일본 국회의사당]]과 구 일본군 [[대본영]]육군부 건물인데, 이 둘까지 해서 그야말로 세쌍둥이같은 설계 구조다. 즉 요약하자면 풍수지리로 기를 누른다는 것 자체는 낭설이지만, 당시 일본 대형 공공건축의 날 일(日)자 설계는 분명 국가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